Page 151 - 고경 - 2023년 6월호 Vol.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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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부터 한학을
연마하고 사서삼경과
제자백가를 두루 읽었
다. 10대 중반에 일본
사진 2. 금강산 마하연사. 이영무 교수는 여기서 석우스님의 지도로
으로 건너가서 임제종 참선 공부를 했다.
계열의 중학교를 다녔고, 1937년에 돌아와 함경남도 석왕사에서 출가했
다. 이때 향림香林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뛰어난 한문 실력 덕분에 강원
에서 사집과를 건너뛰고 바로 사교과를 배웠다고 한다.
1942년 강원에서 대교과까지 마친 후 참선 공부에 전념하여 금강산 마
하연과 오대산 상원사의 선원에서 각각 설석우, 방한암의 지도를 받았다.
이처럼 이영무는 선과 교를 두루 섭렵한 불교계의 신진 기예로 성장했다.
1943년 하안거를 마칠 때 상원사 조실 방한암은 그의 재능과 한학 실력을
인정하면서 ‘흐르는 물이 한 곳에 머물면 탁해지고 썩게 되므로 세속에 나
가 더 공부하여 불법을 펼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그 영향인지 이듬해에
상경한 그는 일단 봉은사에서 강사를 하며 지냈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이한 그는 학업을 계속해 나갈 결심을 하고 1946
년에 새로 문을 연 동국대 사학과의 1기생으로 입학했다. 어릴 때부터 역
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불교가 한국사에 미친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에 사
학 연구가 곧 불교 연구라고 여겼다고 한다. 동국대 재학 시절 서울 성동중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에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1950년 봄
동국대를 졸업했고 얼마 후 6·25 전쟁이 터지자 대구로 내려갔다. 1953년
에는 대구 능인고등학교의 사회생활과 교사가 되었는데, 이 무렵부터 그는
한국불교 연구를 시작했고 1957년 경북대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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