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6 - 고경 - 2023년 7월호 Vol.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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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은해사 일주문.
殿이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중에도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1712년(숙종 38)
에 와서 은해사가 종친부宗親府에 소속되면서 사세가 전격적으로 커지게
된다. 왕실의 후광으로 세금이나 부역, 공납 등이 경감되었고 사찰 인근의
땅도 매입하여 소나무도 심었다.
은해사가 종친부에 속한 이상 이제 유생들이 승려들을 마음대로 부리거나
수탈하기 어려웠다. 이후 은해사에는 불사가 계속되었다. 1750년에 가장 큰
불사가 이루어졌는데, 은해사와 백흥암 등에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가 조
성되었고, 그 이후에도 기기암과 운부암, 중암암 등에 아미타회상도阿彌陀會
上圖를 모셨다. 미타도량으로서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갖추어갔다.
당연히 염불신앙도 중요시되었다. 『염불환향곡念佛還鄕曲』을 쓴 기성쾌
선箕城快善(1693~1764) 대사가 기기암을 중심으로 염불결사를 만들고 교학
의 통섭도 추진하였다. 팔공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미타신앙은 17세기 후
반부터 동화사가 그 중심지였는데, 18세기에 오면서 은해사 등으로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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