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4 - 고경 - 2023년 8월호 Vol.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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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한 게 없으니
              임종게를 남길 이유가 없네
              오직 인연에 따를 뿐이니

              모두들 잘 있게    1)



           이 임종게를 남긴 사람은 천 년 전, 당대 제일의 승려였던 원오극근
          (1063~1135)입니다. 문자선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벽암록』 이 원오의
                                                              2)
          강의록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한 게 없다는 말은 다소 충격적입니다.

          나아가 선승은 임종게를 남겨야 한다는 형식적 관념에도 일격을 가한
          것입니다.
           그가 남긴 말은 “모두들 잘 있게[珍重]”라는 한마디입니다. ‘진중珍重’의

          속뜻은 몸을 아끼라는 말입니다. 개인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면서 자신

          을 낮추고 남은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모습에는 범접할 수 없는 위상
          이 있습니다. ‘진중’을 거듭 말함으로써 말의 의미뿐 아니라 말의 질감과
          감촉에 한없이 다정하면서도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무게감을 더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깊게 주변을 살피며 산길을 걸을 때마다 생명의 변화무쌍

          과 죽음을 생생하게 느낍니다. 살아 있으면서 삶의 덧없음을 생생하게 경
          험하는 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덧없는 인생 속에서뿐입니다. 죽음이 없다면 살아 있다는 기쁨 또

          한 사라질 것입니다.






          1) 『僧寶正續傳』 券四 圜悟勤禪師條 : 已徹無功 不必留頌 聊爾應緣 珍重珍重
          2)  설두중현의 『송고백칙頌古百則』에 원오극근이 수시(垂示)·착어(著語)·평창(評唱)을 덧붙여 저술한 책이 『벽암
           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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