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2 - 고경 - 2023년 9월호 Vol.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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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 운부암 보화루.
2월에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영남지역을 다닐 때 운부암에 오래 머문 적이
있는데, 이 당시 운부암에는 추사선생과 교유한 시승詩僧들도 주석하고 있
어 교유의 인연도 생겼다. 환재선생은 20년 선배인 추사선생과도 교유가
깊었다. 1863년에 박규수 선생은 이 3개의 현판을 썼는데, 글씨를 쓴 연유
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아마도 그 전에 운부암에 머물렀던 시절의 인연
으로 스님들 중 누군가 환재선생에게 부탁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격변하는 국제정세의 변화도 모른 채 조선이 깊이 잠들어 있고 세도정
치가 막장을 달리며 나라를 망쳐가고 있을 때, 시대의 선각자였던 박규수
선생은 조정에서 개혁의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역부족만 절감하였다. 그는
오경석吳慶錫(1831~1879) 선생, 유홍기劉鴻基(1831~?) 선생, 이동인李東仁
(?~1881) 화상과 함께 뜻을 모으고 지금의 서울 안국동 헌법재판소 자리에
있는 자기 집에 북촌의 젊은 자제들을 모아 미래를 도모하였으니, 여기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서재필徐載弼 등과 같은 갑신정
변甲申政變의 주역들이 배출되었다.
이들이 목숨 걸고 거사한 정변이 성공하여 국정을 개혁하고 근대국가로
나아갔더라면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조선이 멸망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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