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4 - 고경 - 2023년 12월호 Vol.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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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노력하여 법을 위해 힘써라


           당시에 요세화상은 왕실과 최우를 중심으로 한 최씨 무신정권의 성원도

          있었지만 세속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밤에는 등불을 켜지 않고 잠

          을 잘 때에도 자리를 깔지 않았다. 시주받은 옷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주었고, 방장실에는 옷 세 벌과 발우 하나뿐이었다. 매일 선관禪觀을 하고
          『법화경』을 외우고, 준제신주準提神呪를 천 번 외우고, 나무아미타불을 만

          번 불렀다. 요세화상은 불교의 가르침이 방대하고 천태지의 대사의 저술

          이 복잡하여 공부하는 이들이 갈피를 잡기 어렵다고 보아 『법화문구法華文
          句』(20권), 『법화현의法華玄義』(20권), 『마하지관摩訶止觀』(20권)에서 핵심만을

          뽑아『삼대부절요三大部節要』를 만들어 이를 유행시켰다. 고종은 1237년(고
          종 24)에 그에게 대선사大禪師 다음 품계인 선사禪師의 호를 내리고 세시歲

          時마다 하사품을 보내고는 했다.
           백련결사운동을 펼쳐 가던 요세화상은 1245년(고종 32) 4월에 상수제
          자上首弟子인 천인화상에게 불사를 부탁하고, 그해 7월에 “30년 산 속에서

          낡은 물건이 오늘에야 가는구나. 각자 노력하여 법을 위해 힘써라.”라는

          말을 대중에게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왕은 그를 국사國師에 봉하고 시호
          를 원묘圓妙, 탑명을 중진中眞이라 하였다. 국사는 사망하였을 때 책봉하는
          것이고 생전에는 승통이나 왕사로 대우한다. 왕명을 받아 한림학사 민인

          균閔仁均(?~?)은 원묘국사로 제수하는 교서敎書를 특별히 지어 존숭하였고,

          최자선생은 백련사주白蓮社主 요세화상의 비문을 지었다. 천인화상은 최우
          의 두 아들 만종, 만전과 법형제의 의를 맺고 최씨정권과 가까이 해 온 터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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