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8 - 고경 - 2023년 12월호 Vol.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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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유학으로 학문적 전환을 확고히 하면서 인간의 구체적이고 현실적 삶
          에 대해 탐구하는 길을 가게 되었고 불교를 비판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평
          생 100여 차례 이상 여러 사찰을 방문하여 시도 짓고 글을 남기기도 했다.

          주자가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 대상은 불교라기보다는 그 당시 풍

          미했던 선종禪宗 특히 홍주종洪州宗이었다.
           이를 모아보면, 주자는 24살 이전에는 그가 배운 선생들의 학문적 경향
          과 승려들을 만나 직간접으로 불교를 접한 경험에서 불교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선 체험도 하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주

          자가 전개한 성리학의 존재론과 인식론, 심론 등에서 구사하는 개념은 불
          교적 개념을 유가적으로 용어를 바꾸었을 뿐, 그 개념은 불교에서 차용한
          것이라는 입장은 이러한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표층종교에서

          는 그 양상이 다를지는 몰라도 심층종교 내지 심층철학에서는 유교철학과

          불교철학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
          달할 수 있다. 어쩌면 노장의 핵심 사상도 포함하여 말이다.
           주자보다 바로 앞 시기에 사물의 본성인 성性과 우주 만물의 원리인

          리理를 탐구하는 성리학을 정립한 북송北宋(960~1127)의 5대가, 즉 주돈이周

          敦頤(1017~1073), 소옹邵雍(1011~1077), 장재張載(1020~1077), 정호程顥(1032~1085),
          정이程頤(1033~1107) 같은 학자들은 승려들과도 교유하며 불교를 수용하거
          나 영향을 받아 그들의 학설을 전개해 나갔다.

           지눌화상이나 요세화상은 이처럼 주자가 남송에서 살아간 시기와 일부

          겹쳐지는 시기를 한반도 고려 땅에서 살았다. 그들 간에는 아무런 소통도
          없었을 것이고 교류도 없었겠지만, 불교와 관련하여 ‘주자의 불교 연관 문
          제’가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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