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7 - 고경 - 2023년 12월호 Vol.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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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통해서 찾지 말지니, 더욱 나와 멀어지리라.
                  나 이제 홀로 가나니, 가는 곳마다 그것을 만나리.
                  그것은 지금 바로 나이만, 나는 그것이 아니라네.

                                                                  12)
                  마땅히 이렇게 깨달아야 비로소 여여如如하게 계합契合하리.

               양개가 물가를 지나다가 물속의 그림자를 본 것을 ‘과수도영過水睹影’이
             라고 하는데, 이는 조동종의 선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는 양개의

             선사상을 논하면서 설명하고자 한다. 이렇게 양개는 운암담성의 법을 계

             승하였다.
               『조당집』의 전기에서는 “당唐 대중大中 말년에, 신풍산新豊山에 머물며
                                        13)
             선의 요지를 크게 홍포하였다.” 라고 하였다. 또한 『동산양개선사어록』에
             서는 “그 후 예장豫章 고안高安의 동산洞山에서 번성하였다.” 라고 하고,
                                                                 14)
                                                                        15)
             『조당집』의 전기에는 “선사가 동산에 거주하니 오백의 대중이 모였다.” 라
             고 하고 있다. 이로부터 양개는 신풍산에서 개당開堂을 한 이후에 동산洞山
             (현 강서성江西省 의풍현宜豊縣)으로 옮겼으며, 그 문하에 오백여 대중이 모였

             음을 알 수 있다.



                입적과 우치재



               『경덕전등록』의 전기에는 당 의종懿宗 함통咸通 10년(869)에 양개는 삭발



             12)  앞의 책, “切忌從他覓, 迢迢與我疎. 我今獨自主, 處處得逢渠. 渠今正是我, 我今不是渠. 應須與
                麽會, 方始契如如.”
             13) 靜, 筠編, 『祖堂集』 卷6(補遺編25, 416a), “唐大中末年, 住於新豊山, 大弘禪要.”
             14) [明]語風圓信, 郭凝之編集, 『瑞州洞山良价禪師語錄』(大正藏47, 520b), “厥後盛化豫章高安之洞山.”
             15) 靜, 筠編, 『祖堂集』 卷6(補遺編25, 426a), “師居洞山, 聚五百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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