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9 - 고경 - 2024년 2월호 Vol.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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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다. 이후 반고가 도끼를 들어 혼돈의 알을 깨뜨리는데, 그렇게 깨진 혼
돈의 두 조각 중 가벼운 것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무거운 것은 아래
로 내려가 땅이 된다.
이것이 천지개벽天地開闢의 원래 뜻이다. 반고는 이후 오랜 세월을 홀로
살다가 죽게 된다. 이때 반고의 각 신체 부위와 작용은 해와 달과 별, 산과
강, 사람과 만물, 바람과 구름과 천둥이 된다. 이처럼 반고신화는 창세신
화에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난생의 모티프, 천지개벽의 모티프, 시체화생
의 모티프를 고루 갖추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반고의 창세신화가 비교적 늦은 시기인 후한 이후 삼국
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통일된 신화 체계에서라면 천지창
조의 신화는 맨 앞에 나타나 여러 신화와 전설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
런데 반고신화는 전형적 창세신화임에도 훨씬 후대인 삼국시대에 나타난
것이다. 무슨 까닭일까?
삼국시대의 직전 왕조인 후한은 불교가 본격적으로 수입된 시기이다.
그러니까 반고신화의 성립이 이 시기에 수입된 불교와 연관된 것은 아닐
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에 속한다. 그러한 관점으로 고찰에 임한 다카
키 토시오(高木敏雄, 1876〜1922)라는 학자가 있었다. 다카키는 인도의 신화
와 반고신화의 유사성을 면밀하게 고찰한 끝에 반고신화가 인도의 브라흐
만 개벽신화와 뿌루샤의 시체화생설을 수입한 결과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인도의 『마누법전』(BC. 200)에 브라흐만이 태초의 황금 계란을 깨고 위쪽의
알 껍질을 밀어 올려 하늘을 만들고 아래쪽의 알 껍질을 밟아 내려 땅을 만
들었다는 신화가 보인다. 또 『리그베다』(BC. 1,500)에는 최초의 인간인 푸루
샤의 신체가 해체되어 만물이 되었다는 시체화생신화가 보인다. 다카키는
반고신화가 이 두 신화를 수입하여 결합한 결과라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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