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2 - 고경 - 2024년 2월호 Vol. 130
P. 112
『서유기』에서 인용한 소강절의 천리수학이다. 이것을 이수理數라고 하는
데 천지만물의 이치를 수학으로 밝힌다는 뜻이다. 소강절에 의하면 우주
에는 이 세상의 연월일시와 같은 원회운세元會運世가 있고, 우주 1년[元]은
129,600년이라는 엄청난 시간의 길이를 갖는다. 그렇지만 우주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우주 또한 생멸의 법칙이 작용하는 현장이라는 것이다. 소강
절은 우주 12달의 마지막 달인 해회亥會의 혼돈을 바탕으로 우주의 생성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이후 자·축·인·순서로 새로운 시간이 흐르면서 우
주의 춘하추동이 전개되고, 그에 따라 우주와 만물은 ‘생성→성장→수렴→
소멸’의 궤도를 따라 운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서유기』가 우주순환에 대한 소강절의 수학적 담론인 원
회운세 중에서 우주 1년과 12달에 대한 부분만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12라
는 숫자를 취해 불교의 12연기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또 『서유기』는 우주
12달의 순환을 말하는 소강절의 이론을 차용하면서 그 마지막 달인 해회亥
會의 혼돈을 그 출발점으로 삼았다. 우주 1년의 출발점인 혼돈은 캄캄한 무
분별의 상태라는 점에서 12연기의 출발인 무명에 배대된다. 무명에서 시
작되는 12연기가 무명으로 돌아가 새로운 윤회를 시작한다는 것이 연기론
의 시간적 해석(삼세양중인과)이다. 이것이 우주의 마지막 달인 해회의 혼돈
에서 출발하여 생주이멸의 과정을 거친 뒤 다시 해회의 혼돈으로 돌아간
다는 소강절의 우주생성론과 구조적 동일성을 갖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반고신화는 불생불멸의 본질을 강조하는 화엄의 법신사상,
혹은 법계연기를 제시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고, 소강절의 천리수학은 차
별적 존재의 순환적 생멸을 드러내는 12연기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가 된
다. 『서유기』는 이 둘을 평행으로 배치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도록
한다. 불생불멸적 본질의 측면에 입각한 연기론과 생멸적 현상의 측면에
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