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9 - 고경 - 2024년 2월호 Vol.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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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술로 날을 보내다가 결국 40살에 북암에서 요절하고 말았다. 몸을 담고
있는 불가의 모습을 보아도 옛 백련결사의 결기는 이제 사라진 지 오래되
었고, 불법의 진면목에 대해 논할 도반도 귀하게 되었다.
바깥세상을 보아도 다산선생 같은 뛰어난 인물이 유배지에서 그 목숨을
기약할 수 없고, 속유俗儒들이 설쳐대고 붕당朋黨을 만들어 서로 모함하고
죽이는 세상이니 안으로 보나 바깥으로 보나 실로 답답한 심정이었을 것
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 생각이 견고하여 누구와 이야기를 쉽게 나누
지도 않았으니 그나마 술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어느 때인가
다산선생은 혜장화상의 센 고집을 지적하며 “어린아이 같이 될 수 없겠는
가.” 하는 말에 당장 호를 어린아이라는 뜻인 아암兒菴으로 바꾼 혜장화상
이었지만 어린아이의 텅 빈 마음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혜장화상의 제문과 탑명을 쓴 다산
때로는 만나서 서로
생각을 나누고 때로는
글을 통해 속 깊은 마음
을 보이기도 했던 혜장
화상이 입적했다는 청
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다산선생은 마음속으
로 흐르는 눈물을 삼키
며 붓을 들어 <제아암
혜장문祭兒菴惠藏文>의 사진 5. 동백꽃이 곱게 내려앉은 백련사 부도전. 사진 백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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