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1 - 고경 - 2024년 2월호 Vol.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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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다시 생각하여 보니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자신이 실제 나랏일을
맡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라가 바로 되고 백성이 행복하게 살려면 이렇
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리라. 그 결과가 위와 같은 저술을 세상
에 펴내는 일이었다. 그로서는 삶을 치열하게 산 것이다. 기술에 대해서 더
알려고 했고 상공업에 대해서도 적극 관심을 가졌다.
군주가 아니라 백성이 나라의 중심이고 백성의 현실적인 삶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생각을 가져야만 하는 일이지만, 그때까지 조
선은 주자의 성리학에만 매달려 있어서 그러하지 못했다. 기호남인畿湖南
人으로 분류된 다산선생의 이 목소리를 일찍이 인조반정仁祖反正(1623)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물실국혼勿失國婚’ 즉 ‘딸을 왕비로 만들어 국가권력
을 절대 놓치지 말자’고 굳게 맹세하고 혈
안이 되어 긴긴 권력투쟁을 이어온 서인노
론세력들이 귀담아 들었을 리는 없었을 것
이다. 다산선생이 저술한 1표表 2서書의 이
런 경세론도 또 누가 어떤 모함을 하며 시
비를 할지 위험하여 당시에는 목판으로 새
겨 책으로 출간되지 못하였고, 따라서 세 사진 6. 1930년대에 출간된 다신의 문
집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상에서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이 1표 2서
는 일제 식민지 시기인 1930년대에 들어와서 다산선생의 저작들을 모두
모아 활자본으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로 출간할 때 그에 포함되어 처음
세상에 알려졌고, 그 후부터 이 책에 대한 소개와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
때는 이미 다산선생이 개혁하려고 했던 조선은 일본에게 망하여 사라진 지
오래된 때였다.
그러나 세상은 조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1776년에 아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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