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0 - 고경 - 2024년 2월호 Vol.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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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문을 지었다. 선생은 <아암장공탑명兒菴藏公塔銘>도 지었는데, 그 명銘이
          “찬란하던 우담바라여,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었구나. 훨훨 날던 금

          시조여, 날아와 앉았다가 날아가 버렸구나.[엽엽우발燁燁優鉢, 조화석언朝華夕
          蔫. 편편금시翩翩金翅, 재지재건載止載鶱]...”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읽을 때마다

          진한 감동을 느낀다. 젊은 지음의 죽음 앞에 안타깝고도 애간장 녹이는 슬
          픔을 생각해 보면 다산선생의 마음이 짐작이 간다.

           1801년 다산선생은 큰형 정약현丁若鉉(1751~1821)과 셋째 형 정약종丁若鍾
          (1760~1801) 등의 일족들이 천주교를 믿었다고 하여 참수를 당하는 신유박

          해의 참변을 겪고, 둘째 형 정약전丁若銓(1758~1816)과 남도로 귀양을 와서
          형은 흑산도黑山島로 떠나고 자신은 강진으로 유배되는 생이별을 한 채 지
          내고 있었다.

           혜장화상을 떠나보내고 다산선생은 일찍부터 국가개혁의 구상을 차례

          로 집필하여 완성하였다. 1817년에는 조선의 부국강병 실현을 목표로 설
          정하고 기존 정치제도와 그 실행의 개혁을 논구한 『경세유표經世遺表』를 완
          료하고, 1818년에 유배에서 돌아와 고향 마재馬峴에 은거하며 정부와 공직

          제도의 개혁에 관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마무리하는 일에 집중하여 1821

          년에 집필을 끝냈다. 1822년에는 민본주의民本主義를 전제로 하여 형법제
          도와 그 실행의 개혁에 관한 『흠흠신서欽欽新書』의 집필도 모두 마쳤다.



            조선이 망한 뒤에 출판된 조선 개혁론



           다산선생도 8대에 걸쳐 대과大科에 합격한 서울경기의 명문집안 출신이
          어서 귀양을 가지 않았으면 중앙 정치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리라 짐

          작이 된다. 그러나 당쟁의 싸움 속에 유배를 당하고, 세상과 나라에 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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