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5 - 고경 - 2024년 2월호 Vol.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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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해, 막부를
연 초대 장군 미나
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의 1주기 법요
식 집전을 맡기도
했다. 부인 호조
마사코北条政子가
세운 수복사壽福
寺의 개산조가 되
었다. 아직은 불안 사진 3. 막부의 지원으로 건립된 교토 수복사壽福寺.
했던 막부 정권에
천태 밀교승인 동시에 선사로서의 에사이는 무사들의 심리적 안정을 꾀하
는 데에 부합한 인물이었다. 막부의 지원을 받은 그는 교토 건인사建仁寺의
개산조로 명성을 날렸다. 선·천태·진언의 종합도량으로 후에 관사가 되
었다. 이로써 왕권가와 무가 양쪽의 협력으로 에사이의 선종은 중세 이래
번영을 구가했다.
그렇다면 에사이는 왜 밀교승의 이미지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을까. 어
릴 때부터의 영향과 시대적 상황, 그리고 천태교단과의 연속성을 유지하
지 않을 수밖에 없는 한계 때문이었다. 후쿠오카의 료벤良辯이 천태종의 승
려들과 더불어 참소하자 에사이는 공개적인 변론을 하게 되었다. 그는 선
문이 이전부터 있었다고 하며, “옛날 비예산의 덴교대사傳敎大師(最澄)께서
『내증불법상승혈맥보內證佛法相承血脈譜』 1권을 저술하셨는데, 그 서두는 곧
달마가 서쪽으로 와서 선법을 전한 일이었습니다. 저 료벤은 어리석어 알
지 못하고 천태의 무리들을 끌어들여 나를 무고했습니다. 만약 선종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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