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4 - 고경 - 2024년 2월호 Vol.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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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이 강해 도움을 받지 못했다. 다시 천태산에 올라 만년사의 허암회창虛
庵懐敞을 만나 사사했다. 회창은 황룡혜남黃龍慧南의 8세손이다. 『원형석
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회창이 “전해 들으니 일본은 밀교
가 매우 왕성하다고 하는데, 그 종지의 처음과 끝을 한마디로 말하면 어떠
한가?”라고 묻자, 에사이는 “초발심을 내면 그것이 정각을 이룸이요, 삶과
죽음에 흔들리지 않으면 곧 열반에 이릅니다.”라고 응했다. 이에 회창은 “
그대의 말과 같다면, 우리 선종과 한가지로다.”라고 화답했다.
4년 동안 회창의 가르침을 받고 임제종 황룡파의 법맥을 계승했다. 1191
년 작별을 고하자 회창은 “옛날 석가모니께서는 입적하실 즈음에 ‘정법안
장 열반묘심’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하셨다. 스물여덟 분에게 차례로 전해져
서 달마에 이르렀고, 다시 여섯 분에게 전해져서 조계혜능에 이르렀으며,
또 여섯 분을 내려와 임제에 이르렀고, 다시 여덟 분을 내려와 황룡선사께
이어졌다. 거기서 다시 여덟을 이어 내려와 그대에게 이르렀노라. 지금 그
대에게 부촉하노니, 잘 받아 지녀라.”라며, 발우·좌구·보병·주장자·
백불白拂 등을 주었다고 한다. 귀국 후에는 후쿠오카에 보국사報國寺를 창
건하며 주로 큐슈지방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했다.
일본 최초의 선종 사찰 성복사 창건
당시 천태종은 노닌의 달마종과 함께 신흥불교의 대두에 제동을 걸었
다. 조정을 움직여 에사이의 활동을 금지시키는 바람에 수도인 교토에서
의 포교는 난관에 봉착했다. 그럼에도 일본 최초의 선종사찰로 부르는 성
복사聖福寺를 세웠다. 마침내 1199년 실권을 쥔 무사들의 본거지인 막부가
있는 가마쿠라鎌倉에서 환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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