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2 - 고경 - 2024년 3월호 Vol.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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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내고 목을 잘라 걸어두는 만행을 저질렀다. 죽은 자를 다시 반역죄로 처
          단하는 것은 명백히 불법이었지만 눈도 깜짝하지 않고 이런 짓을 했다. 고
          종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자기 좋은 것만 하며 국고를 탕

          진하고 있었다. 군주제에서는 무지하고 무능한 자가 왕으로 앉아 있는 것

          은 최악이다. 그런 고종은 결국 1910년 전쟁도 해보지 않은 채 일본에게 나
          라를 내주고 일본 정부가 주는 작위爵位와 거액의 돈을 받고 연명하는 길
          을 걸어가게 되지만 이것도 나중에 보게 되는 장면이다.

           혜장화상의 뛰어남은 중국 학단에도 알려져 1811년에 우리나라 사신이 연

          경燕京에 갔을 때 완원阮元(1764~1849) 선생과 옹방강翁方綱 선생(1733~1818)의
          아들 옹수곤翁樹崑(1786~1815)이 대둔사에 주석하고 있는 혜장화상이 유불에
          통달한 해동의 고승이라는 말을 듣고 옹방강의 『복초재시집復初齋詩集』 1

          부部를 주었다.

           그러나 사신이 돌아와 보니 이미 혜장화상은 입적한 다음이라 1812년에
          그의 적전제자인 수룡색성袖龍賾性(1777~?) 화상과 기어자굉騎魚慈宏 화상
          이 주석하고 있는 대둔사로 보냈다. 오늘날 대흥사에 옹방강의 시집이 있

          는 사연이다. 이는 25세 청년 김정희金正喜(1786~1856) 선생이 연경으로 가

          서 1810년 옹방강 선생을 만난 일이 있은 지 2년 뒤의 일이다.


            백련사 도량의 현재와 당우




           현존하는 당우로는 일주문一柱門, 해탈문解脫門, 만경루萬景樓, 대웅보
          전大雄寶殿, 시왕전十王殿, 천불전千佛殿, 나한전羅漢殿, 칠성각, 육화당六和
          堂,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다. 주차장에서 사역으로 들어서는 곳에 일주문

          이 근래에 들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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