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9 - 고경 - 2024년 4월호 Vol.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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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면 나는 지금 강서 마조의 수제자이고 훗날에는 해동의 할아버
                  지가 될 것이니 스승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으리라.”
                                                            1)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마곡에서 무염으로 이어지는 선법은 단

             순한 인가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선법이 신라 땅에서
             꽃을 피울 것이라’고 혜능과 마조가 예견하였는데, 그 예견이 무염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곡의 열반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당

             무종의 회창법난이 일어났으니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 『조당집』 17권

             에는 마곡의 법을 이은 이로 무염의 이름만이 수록되어있다. 또 『전등록』
             9권에는 마곡의 법을 이은 이로 수주壽州의 양수良遂만이 보이고 있어서 마
             곡에게 있어 무염이 수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마곡이 열반에 들자 무염은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고독한 사람, 병

             고를 겪고 있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폈다. 20여 년 동안 이와 같은
             보살행을 실천하자 그의 이름이 중국 전역에 퍼졌고, 사람들은 그를 ‘동방
             대보살’이라고 추앙하였다.




                성주산문의 개산과 교화


               무염은 845년(회창 5, 문성왕 7년)에 당 무종의 명에 의하여 신라에 귀국하

             게 된다. 그리고 이전에 인연이 있었던 김흔이 조상이 봉지로 받은 보령의

             오합사烏合寺에 와서 머물기를 청한다. 김흔은 태종무열왕의 9세손으로 김
             양金陽과 동일 인물로 소개된 곳이 더러 있지만, 김양의 사촌형이다. 김양




             1) 최치원 찬, 『대낭혜화상 백월보광지탑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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