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1 - 고경 - 2024년 4월호 Vol.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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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법을 물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도를 구하였다.
               헌강왕이 몸이 아파 사신을 파견하여 궁중으로 모시고자 하였을 때 무
             염은 “산승의 발이 대궐에 닿는 것이 한 번만 되어도 지나치다 할 것인데,

             나를 아는 자는 ‘성주’를 ‘무주無住라’ 하고, 나를 모르는 자는 ‘무염’을 ‘유

             염有染’이라고 할 것이다.” 하면서 사양하였다. 이처럼 무염은 성격이 공손
             하고 자애로웠으며 손님을 대할 때에는 귀천을 가리지 않았고, 언제나 다
             른 승려들과 함께 똑같이 거친 밥을 먹었다. 절에 큰 불사가 있을 때에는

             앞장서서 일을 하였고, 평소에도 물을 긷고 나무를 하였다. 또 제자들을 가

             르칠 때에는 “마음이 비록 몸의 주인이지만, 몸이 마음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여 실천을 강조하였다.



                ‘무설토론無舌土論’의 문제



               1293년(충렬왕  19)에  천
             책天頙이  지은  『선문보장

             록禪門寶藏錄』에는  무염의

             ‘무설토론無舌土論’이  수록
             되어 있다. ‘선교대변문禪敎

             對辨門·제강귀복문諸講歸
             伏門·군신숭신문君臣崇信

             門’ 등 3장으로 구성된 『선
             문보장록』 가운데 무설토론             사진 5.  고려 천책의 『선문보장록』,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은  범일의  ‘진귀조사설’과

             함께 ‘선교대변문’에 실려 있다. 천책은 무염의 무설토론의 출처를 『해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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