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6 - 고경 - 2024년 4월호 Vol. 132
P. 86

비변사가 변방의 장군이 말을 달려와 보고한 것과 관련하여 아뢰
              기를, “관서 지방의 승려는 해마다 의주 등의 축성하는 곳에서 부
              역하고 있으며, 변방에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역시 성을 지키는

              군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경기 지방의 남한산성을 쌓는

              일에 어찌 관서의 승려를 징발하여 일을 시켜야 하겠습니까. 승려
              들 중에 군향軍餉을 바치고 도첩을 받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받
              아들이라는 뜻으로 공문서를 내려주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

              금이 답하기를, “그대로 윤허한다. 그러나 축성하는 일에 승려를

              활용하고 나서 또 쌀을 받는다는 것은 타당하지 못할 듯 하니, 쌀
              을 받는 조항은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 『인조실록』 2년, 1624년 11월 30일



           인조 대에 산성 축성을 위해 승려에게 도첩을 발급하기는 하였으나 그
          때뿐이었던 것 같다. 현종 대에 사헌부에서 승려에게 도첩을 발급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임금이 거절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현종실록』 11
          년, 1670년 1월 6일) 그 후 승려의 도첩과 관련한 기록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데, 이는 1675년(숙종 1)에 승려를 호적에 등재함으로써 도첩을 발급할 필
          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승려를 호적에 등재한다는 것은 승려가 되더
          라도 일반 백성과 똑같이 신역과 납세의 의무를 가지기 때문에 도첩을 발

          급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때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승려가

          가지고 있던 비非 속인, 즉 성직자로서의 특권은 거의 없어졌다.










          86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   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