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3 - 고경 - 2024년 6월호 Vol.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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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말씀을 전달하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성철스님을 ‘철스님’이
             라고 불렀어요. 윤필암 대중이 30명 정도였는데, 성철스님은 “무엇이든 절
             대적으로 믿고 따라주겠다.”는 우리의 다짐을 받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또 “불조의 말씀과 사상을 주입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하지 않

             으면 안 가르치겠다. 시작을 안 한다.”는 그런 조건부로 시작하시거든요.
             그래서 모두 다 따랐습니다. 청담스님, 자운스님 전부 다 큰스님네가 뭔가
             우리보다 달라서 무조건 배워야 되겠다 하는 그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그

             때 윤필암 비구니나 다른 암자에서 홀로 정진하는 분들도 윤필암에서 법

             문이 있다고 그러면 다 와서 듣고 그랬습니다. 성철스님은 극성극패의 성
             질을 가지셨어요. “안 하면 안 하고, 하면 참 죽기살기로 한다.” 하시는데,
             오히려 극성스러운 사람들을 잘 가르칩니다.

               봉암사 결사에 참여한 비구니는 윤필암 스님들입니다만, 그 전이나 후

             에도 비구니 스님들이 오고 가고 왕래를 잘했습니다. 수덕사 만공스님께
             배우는 견성암 비구니들이 윤필암으로 오고, 방한암스님께 배우던 오대산
             지장암의 비구니들도 오고 가고 했습니다.

               인홍스님은 6.25가 나니까 거기서 그들을 데리고 남방으로 내려오셔서 윤

             필암에 오셨는데, 해방되기 전에도 왕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걸망
             을 북태산같이 짊어지고 걸어서 다녔거든요. 평창 진부면에서 오대산까지
             걸어서 들어갔답니다. 거기가 20리나 30리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대승사는

             점촌이라는 데서 내려서 윤필암으로 오려면 60리를 걸어야 됩니다.

               견성암에서 오신 덕수스님, 종현스님도 보았구요, 묘경 그러면은 사람
             들이 ‘경스님’ 이래 불렀어요. 법희 노스님은 ‘비구니의 도인’이라 그럽니
             다. 참선을 잘해서 만공 노스님의 비구니 제자로서 공부를 가장 잘한다고

             했습니다. 또 만성스님도 그랬습니다. 그 일타스님 누님인 응민스님도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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