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9 - 고경 - 2024년 6월호 Vol.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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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팔만대장경판. 사진 해인사


                  기록하여 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세

                  종실록』 19년, 1437년 4월 28일)


               임금이 해인사의 대장경판을 도성 근처 사찰로 옮기는 방안에 대해

             논의해 보라고 하였는데 대신들은 수송하는 폐단이 있다는 핑계로 이

             를 거절하고 대신에 합천의 수령으로 하여금 잘 관리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에서는 대장경 판본을 수십 차례 하사하면서도 끝내 대장경 목판만

             은 포기하지 않았다. 대장경판을 국가의 보물로 여긴 이유도 있었겠지만

             당시 일본이 조선과 같은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아니라 지방분권적인 국가
             였기 때문에 어느 한 세력의 요구만을 들어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
             던 것 같다. 대장경판을 가지고 있어야 여러 세력의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

             면서도 그들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받아낼 수 있는 카드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대장경을 구청하는 것은 막부만이 아니었다.
             규수나 대마도를 비롯한 지방정권에서도 직접 조선에 대장경을 요구했다.
             그래서 이후에 일본의 다른 실력자가 대장경을 요구하더라도 인쇄된 대장

             경을 주기 위해 대장경판만큼은 하사하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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