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4 - 고경 - 2024년 6월호 Vol.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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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봉스님도 열반에 임해 그 상좌였던 명정스님에게 당신을 보려면 “야반3
          경에 문빗장을 만져 봐라.”고 유촉했다. 선문에서 야반3경은 단순한 단어
          가 아닌 것이다. 왜 하필 3경인가? 거기에는 표층적인 이유와 심층적인 이

          유, 두 가지가 있다.

           표층적인 이유로는 다른 사람이 엿듣거나 알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
          해서다. 다른 사람이 엿듣는 것을 『서유기』에서는 여섯 귀가 듣는다고 표
          현한다. 법을 전수받는 자리에는 스승의 귀 두 개와 제자의 귀 두 개를 합

          쳐 네 귀만 있어야 한다. 왜 그런가?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확인하는 현

          장은 의외로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영리한 사람이라면 이것을 엿듣고 그
          원리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원리를 짐작하고 이해하는 일은 당
          사자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일

          은 재앙에 가깝다. 법이라고 불리는 객관적인 무엇이 따로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깨달음의 확인은 모두가 잠든 3경
          이 아니라 할지라도 어쨌든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야 한다.
           심층적인 이유로는 분별적 생각이 잠드는 시점이 3경이기 때문이다. 한

          편으로는 분별적 생각이 정지하여 잠든 상태와 같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

          는 무분별의 진여지혜가 열려 있어야 법을 전수받을 수 있다. 3경은 11시
          에서 1시 사이니까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보통 사람들은 밝음
          에서 어두움으로 넘어갈 때 또렷한 의식작용을 내려놓고 캄캄한 무지각에

          빠진다. 이 상태라면 스승의 부름에 응할 수 없고, 전해주는 법을 받을 수

          없고, 문빗장을 만져볼 수 없다. 어두움의 극치인 12시에서 밝음의 시작인
          1시로 넘어가듯 무지각의 잠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야반3경
          은 단순히 시간을 나타내는 어휘가 아니라 오매일여의 차원을 나타내는 단

          어가 된다. 보살의 수행이 제8지를 넘으면 잠이 사라지는 멸진정의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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