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8 - 고경 - 2024년 6월호 Vol.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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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가지산문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체징의 출가와 구법 과정




           체징의 비문인 「가지산 보조선사 창성탑비명」은 884년 헌강왕의 명에
          의하여 김영金穎이 찬술하였다. 김영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에 합격
          한 인물로서 당나라에서 ‘조청랑 수정변부사마 비어대’란 관직을 제수받았

          고, 헌강왕과 진성여왕 대에 금성군(나주) 태수를 지냈던 인물이다. 그는 대

          통大通의 비문인 「충주 월광사 원랑선사 대보선광탑비명』을 찬술하였고,
          남원 실상사에 남아 있는 수철화상의 비문 또한 그가 찬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김영의 행적은 최치원을 떠올리게 한다.

                                            체징의 성씨는 김씨이고 웅진(공

                                          주) 출신이다. 어린 나이에 화산花山
                                          권법사勸法師의 문하에서 경을 배우
                                          고, 827년(흥덕왕 2)에 24세의 나이

                                          로 화엄종 소속의 서산 보원사에서

                                          정식으로 구족계를 받았다. 체징은
                                          이미 7~8세에 속세의 인연을 버리
                                          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그럼에

                                          도 그의 나이 24세가 되어서야 구족

                                          계를 받았던 것은 당시 정치적인 상
                                          황과 관련이 있다. 체징이 19세가 되
                                          던 822년에 웅진지역을 중심으로 김
          사진 2.  전 홍법사 염거화상 부도탑. 국립중앙박
              물관.
                                          헌창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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