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9 - 고경 - 2024년 6월호 Vol.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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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여의 짧은 기간에 불과하였지만, 김헌창은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부르며 한때 후백제 지역을 능가하는 지역을 차지하
였다. 또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그의 아들 김범문이 825년에 재차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827년에서 837년 사이 체징은 보원사를 떠나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
물고 있던 염거의 문하에 들어간다. 이 시기 830년에 진감혜소가 26년 만
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였는데, 그는 당나라에서 도의를 만나기도 하였다.
혜소가 귀국하자 흥덕왕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그를 환영하고 위로
하였다.
도의선사가 전날에 이미 돌아왔고, 스님(혜소)께서 잇달아 돌아
오시니 두 보살이 되었도다. 옛적에 흑의黑衣를 입은 호걸(석도
안)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누더기 입은 뛰어난 스님을 친
견하게 되었구나. 하늘에까지 가득한 자비스런 위엄에 온 나라
가 기쁘게 의지하니, 나는 장차 동쪽 계림 땅에 상서로운 곳을 만
들 수 있겠다. 1)
위의 내용을 통해 볼 수 있듯이 830년 혜소가 귀국할 당시 도의는 이미
불교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최치원은 「희양산 봉암사 지증
대사 적조탑비명」에서 도의가 설악산에 은둔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 최치원 찬, 「지리산 쌍계사 진감국사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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