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2 - 고경 - 2024년 6월호 Vol.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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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에서 가지산문의 개산
840년(문성왕 2)에 귀국한 체징은 고향(웅진으로 추정됨)에서 교화를 시작
하였는데,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859년(헌안왕 3)에 무주(광주) 황
학난야黃壑蘭若로 주석처를 옮겼다. 아마도 사람들이 모여들어 더 큰 도량
을 찾았던 것으로 보이며, 847년 무염이 보령에 성주산문을 개산하였기 때
문에 남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체징이 무주에서 주석하고 있을 때 헌안왕이 그 소식을 듣고서 그를 애
타게 찾게 되는데, 이는 호남 지역의 민심을 다스리기 위한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체징과 헌안왕의 가교 역할을 한 사람은 장사현長沙縣(전북 고창
지역) 부수 김언경金彦卿이었다. 859
년 6월 헌안왕은 처음에 김언경을
통하여 차와 약을 보내어 교지를 전
달하였지만 체징은 혜능이 그랬던
것처럼 왕의 부름을 사양하였다. 그
럼에도 그해 12월에 헌안왕은 영암
군 승정 연훈법사連訓法師와 빙선馮
瑄 등을 다시 보내 가지산사(보림사)
에 옮겨 거주하기를 청했다. 이에
체징이 가지산사로 가게 되었다. 이
듬해인 861년(경문왕 1)에 확장 공사
를 마치고서 체징이 가지산문을 개
산한다. 이때의 모습을 김영은 다음
사진 4. 장흥 가지산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
사진: 서재영. 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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