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3 - 고경 - 2024년 6월호 Vol.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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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0년(헌안왕 4) 2월에 부수 김언경이 삼가 제자의 예를 갖추어 일
찍이 제자가 되어 문하에 들어갔는데, 맑은 녹봉을 털고 사재를 내
어서 철 2천 5백 근을 사서 노사나불 1구를 조성하여 선사께서 거
주하는 절을 장엄하였다. 교지를 내려 망수리望水里 마을 남쪽의 집
들도 금 160분과 조 2천 곡斛(열 말)을 내게 하여 공덕을 꾸미는데
충당하게 하고 사찰을 선교성宣敎省(국왕직속의 기구)에 예속시켰다.
861년(경문왕 1)에 각지에서 시주한 재물로 그 절을 확장하니,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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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마치고 경축하는 날에 선사가 그 자리에 임하였다.
이처럼 가지산문의 개산은 표면적으
로 헌안왕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성립
된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바
라본다면 이미 호남 지역의 민심이 신
라 왕실과 중앙귀족들로부터 이탈되었
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880년(헌강왕 6) 열반에 들기까지 체징
은 20년 동안 가지산문을 크게 중흥시
켰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가지산문을 개창한 체징이 산문의 정체
성을 분명히 하였다는 점이다. 그것은
가지산문의 초조 도의, 2조 염거를 이어
자신이 3조임을 선포한 것이다. 이는 남 사진 5. 장흥 가지산 보림사 보조선사창성
탑비명(보물 158호). 사진: 서재영.
3) 김영 찬,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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