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1 - 고경 - 2024년 6월호 Vol.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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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인 염거를 찾아갔다. 체징이 염거를 찾아가 인가를 받게 된 경위를 김
             영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처음 도의대사가 서당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은 후에 우리나라에 돌

                  아와 그 선의 이치를 설파하였다. 그때 사람들은 오직 경의 가르침
                  과 관법觀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만을 숭상하고 있어 무위임
                  운無爲任運의 종宗에는 이르지 못하여 허망하게 여기고 숭상하지 않

                  는 것이 마치 양무제가 달마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았다. 이런

                  까닭에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
                  거선사에게 부촉하였다. 이에 염거선사가 설악산 억성사에 머물면
                  서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체징선사가 가서

                  그를 섬겼다. … 염거선사가 체징의 뜻과 기개가 보통과 달리 뛰어

                  남을 살핀 후 현주玄珠를 부촉하고 법인法印을 주었다.              2)


               억성사에서 염거로부터 인가를 받은 체징은 837년(희강왕 2) 동학인 정

             육貞育·허회虛會 등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간다. 선지식을 찾아 15주를 유

             력하였지만, 도의와 염거의 가르침과 별로 다른 바가 없음을 느끼고서 840
             년(문성왕 2)에 귀국한다. 이때 국내에서는 836년 왕위계승분쟁에서 패배한
             김우징이 장보고가 다스리던 청해진에 피난 와서 의탁하였고, 839년에 장

             보고는 군대를 이끌고 궁에 들어가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세웠다. 그 해 신

             무왕이 갑작스럽게 죽고 이어 문성왕이 즉위하였다. 체징의 입당과 귀국
             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2) 김영 찬,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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