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4 - 고경 - 2024년 6월호 Vol.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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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선의 정맥이 도의를 통하여 신라 땅에 전해졌다는 정통성의 선언이자,
도의와 염거가 설악산에서 폈던 ‘무위임운, 무수무증’의 조사선 사상을 가
지산문을 통하여 올곧게 계승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 할 수 있다.
체징이 열반에 든 3년 후 883년(헌강왕 9) 문인 의거義車 등이 행장을 엮
어 비명을 세워 달라고 헌강왕에게 청하자, 왕은 시호를 ‘보조普照’, 탑호를
‘창성彰聖’, 절 이름을 ‘보림寶林’이라 내려주었다. ‘보림사’는 다름 아닌 육조
혜능이 조계산에서 법을 편 사찰의 이름이니, 장흥 보림사가 남종선의 본
산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가지산문의 전승
체징의 제자가 800여 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법을 전한 제자
로 우리에게 알려진 인물은 선각대사 형미逈微(864~917)뿐이다. 체징의 제
자들의 활약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체징의 사후예 가지산문이 후백제에
속했기 때문이다. 892년 견훤이 무진주에서 일어나 900년 완산주에서 후
백제를 건국하였기 때문에, 견훤에게 동조하였던 승려들의 기록은 역사 속
에서 사라진 것이다.
형미가 체징으로부터 법을 받았다는 것은 최언위崔彦撝가 찬한 「강진 무
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명」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드디어 장흥 보림사에 가서 보조 체징선사를 친견하였다. (체징) 선
사가 법을 이은 것은 도의의 손자이다. 체징은 (형미를) 처음 본 순
간 “비록 초면이지만 문득 오래전부터 서로 잘 아는 것 같다.”라고
하고, “옛날 서로 이별한 지 오래거늘 어찌 이리 늦었는가?”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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