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5 - 고경 - 2024년 6월호 Vol.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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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실을 허락하였다. … 그로부터 부지런히 정진하여 항상 스님의
좌우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882년(헌강왕 8)에 이르러 화엄사 관
4)
단官壇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위의 내용을 통해 보면 체징과 형
미가 법을 주고받은 것처럼 오인할
수 있으나 실제 두 사람이 만날 수 있
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설사 체징이
열반에 든 880년에 만났다 가정하더
라도 형미의 나이 17살 때이다. 또 이
비문은 946년에 최언위(968~944)가
찬했다고 하는데, 이때는 최언위가
이미 서거한 후이다. 체징은 당나라
에 들어가 청원행사의 5대 법손인 운
거도응에게 인가를 받고서 905년(효
공왕 9)에 귀국하였다. 사진 6.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사진: 국가유
산포털.
주지하다시피 형미는 궁예의 폭
정에 항거하다가 피살된 인물로 여엄(861〜929), 이엄(870〜936), 경유
(871〜921)와 함께 ‘해동의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 같
은 형미의 행적은 도의를 초조로 받들었던 체징의 정신과는 동떨어져 있
다. 따라서 형미가 체징의 법을 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으며, 고려말
보각일연과 태고보우에 이르러 가지산문은 다시 중흥하게 된다.
4) 최언위 찬,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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