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 - 고경 - 2024년 6월호 Vol. 134
P. 28

문하시는 것을 듣고 홀연히 과거와 미래가 끊어지니 마치 한 뭉치 헝클어진
          실을 칼로 한번 끊으면 다 끊어지는 것과 같았다. 원오스님이 대혜스님에게
          말씀하셨다.

           “아깝구나. 너는 죽었으나 살아나지 못하였으니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다. 죽은 후 다시 살아나야 스스로를 속일 수 없느니라.”
           원오스님 방에 들어갈 때마다 ‘유구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
          다’는 공안을 들어 물으시고 내가 겨우 입을 열려고 하면 즉시 ‘아니다’라고

          만 말씀하셨다. 내가 비유를 들어 “이 도리는 흡사 개가 뜨거운 기름솥을

          보는 것과 같아서 핥으려 하나 핥을 수 없고 버리자니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니, 원오스님이 “너의 비유가 지극히 좋구나.” 하셨다.
           어느 날 원오스님이 “나무가 넘어지고 등칡이 마르니 서로 따라온다.”고

          법문하시는 것을 듣고 내가 즉시 이치를 알고는 “제가 이치를 알았습니

          다.” 하였다. 원오스님이 “다만 네가 공안을 뚫고 지나가지 못할까 두렵
          다.” 하시고는 한 뭉치의 어려운 공안을 연거푸 들어 물었다. 내가 이리 물
          으면 저리 대답하고 저리 물으면 이리 대답하여 거침이 없으니 마치 태평

          무사한 때에 길을 만나 가는 것처럼 다시 머무르고 막힘이 없으니 그제서

          야 “네가 스스로를 속이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을 알았다.
           대혜스님이 자기가 알았다고 큰소리 친 이후 한참의 세월 만에 몽중일
          여가 되어서는 부처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고 감격해 한 일은 앞에서 설

          명했습니다. 그래서 몽중일여가 되니 공부가 다 된 것 아닌가 하고 원오스

          님을 찾아뵈었습니다. 그러나 원오스님은, “너의 지금 경계도 성취하기 어
          렵지만 참으로 아깝구나! 죽기는 했으나 살아나지 못하였으니 언구言句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다. 죽은 후 다시 살아나야 너를 속일 수 없느

          니라.”하고 경책하였습니다.



          26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