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 - 고경 - 2024년 6월호 Vol.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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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제단’의 경계에 머무는 일을 선문에서는 “죽기는 했으나 살아나지
             못하였다.”며 철저히 배척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철저히 깨쳐 활연히 크
             게 살아나야만 바르게 깨쳤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크게 죽은 후에 다시

             크게 살아나기 전에는 공안의 심오한 뜻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

             오스님이 대혜스님에게 “언구, 즉 공안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라
             고 하신 것입니다. 몽중일여가 되고 숙면일여가 되었다 하여도 공안의 뜻
             을 알 수 없는데 하물며 번뇌가 여전한데도 공안을 알았다 하고, 견성했다

             하고, 보임保任한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임제종 정맥에서 원오스님과 대혜스님은 역사적으로 유명하고 큰스님
             입니다. 이런 큰스님들의 경험담이고 서로서로 지시하고 지도하고 의지한
             그런 공부 방법이니 여기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심을 하게 된다면 결국

             자기만 죽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공부 과정은 선종뿐 아니라 전체 불교에

             서도 표준입니다. 이처럼 대혜스님이 원오스님의 지시를 따라 ‘유구有句와
             무구無句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라는 공안을 참구하여 마침내 원
             오스님의 법문에서 다시 살아나 깨쳐서 일체 공안을 바로 알아 인가를 받

             은 것입니다.

               내가 늘 고불고조古佛古祖의 뜻을 따르자고 하니 조상의 뼈만 들춘다고
             나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인데, 고불고조를 표방해서 전통적인 큰
             스님들 법문을 귀감으로 삼고 거울로 삼아야지 공연히 내 옳으니 네 그르

             니 하여 서로서로 비방할 일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표준은 고불고조에

             두어야 하니 원오스님이나 대혜스님 같은 큰스님들이 실제로 몽중일여가
             되고 오매일여가 되어서도 거기서도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참으로 화두
             를 참구하여 깨쳐서 비로소 조사가 되고 도인이 되고 했으니 이것을 모범

             으로 삼지 않으면 무엇을 모범으로 삼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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