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4 - 고경 - 2024년 6월호 Vol.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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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3년(세종 5) 12월 25일에, 일본 사신 규주圭籌 등이 대장경 목판을 요
          청하자, 조정에서는 우리나라에 오직 1본 밖에 없으므로 줄 수 없고, 대신

          에 대장경 1부 및 범자梵字로 된 밀교경판密敎經板과 주화엄경판注華嚴經
          板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틀 후 12월 27일에 규주는 다시 다음과 같

          이 요청한다.


              우리 일본 조정에서 요구하는 바는 대장경판인데, 지금 전하께서

              허여해 주신 것은 모두 다른 것들입니다. 비록 이것을 가지고 일본

              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우리 국왕의 뜻에 맞지 않을 것이요, 저희
              들은 견책을 당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우리 무리를 불쌍
              히 여기시고 총명하심에 귀 기울이시어 일본 조정에서 요청하는

              경판을 하사하신다면 임금님의 은혜요, 저희들의 소원입니다.



           이듬해(1424) 1월 1일에도 규주는 또다시 글을 올리며, “비록 이것을 싣
          고 가서 우리 전하께 올리더라도 본래 원하던 것에 비해 부족하여 마음에

          차지 아니할 것이요, 또 범자로 쓰인 책은 그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한갓 여러 보배 가운데 하나로만 여길 뿐입니다.”라 하고, 1월 2일
          부터 단식에 들어갔다.



              규주와 범령이 경판을 구하였다가 얻지 못한다 하여 음식을 끊고

              말하기를 “우리들이 온 것은 오로지 대장경판을 구하려는 것입니
              다. 우리들이 처음 올 때에 일본 국왕에게 아뢰기를 ‘만일 경판을
              받들어 오지 못할 경우에는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였습

              니다. 이제 얻지 못하고 돌아가면 말한 대로 실천하지 못한 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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