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2 - 고경 - 2024년 9월호 Vol.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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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니 만계萬計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 세종 30년, 1448년 7월 21일.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아마도 1434년(세종 16) 무렵 내불당을 폐지했

          다가 훗날 다시 복원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 세종은 왜 내불당을 복
          원한 것일까? 내불당은 복원하면서 왜 종파·승록사 등은 복원하지 않

          은 것일까? 왜 사원의 조세 수취권은 회복시키지 않은 것일까?
            세종 대의 불교 정책은 태종의 배불정책을 계승하고 있다. 그래서 종

          파를 축소하고 사찰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대폭 축소시켰다. 그러나 왕
          실 비빈들의 불교 신앙만큼은 배불정책과 상관없이 유지되고 있었고, 이

          는 세종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정책적인 측면에서
          불교의 정치·경제적 권력을 축소해 갔지만, 불교에 대한 내면적 신앙만큼

          은 버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왕비인 소헌왕후의 사망 이후 더욱 깊어졌다.



            소헌왕후의 사망과 세종의 불교신앙



            소헌왕후는 1446년(세종 28) 3월 24일에 훙서薨逝하였다. 이틀 후에 세

          종은 왕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불경 제작을 명하였다. 그런데 승정원
          에서 반대하였다. 그러자 세종은 “그대들이 불경 만드는 것을 그르다 하

          지만 어버이를 위해 불사佛事 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세종실록』 28
          년, 1446년 3월 26일)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집현전에서

          나섰다.



               집현전에서 아뢰기를, “어제 사헌부·사간원과 집현전에 공문을 보
               내시어, 왕비를 위하여 불경을 조성하겠다는 뜻으로써 명하셨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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