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선림고경총서 - 22 - 나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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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장 51
금경사로 보내셨고,그 이튿날 또 대언 김진(代言 金鎭)을 보내 스
님을 내정(內庭)으로 맞아들여 위로하신 뒤 안장 채운 말[鞍馬]을
내리셨다.그리고는 내시 안익상(安益祥)을 보내 회암사로 보내 드
리니,스님은 회암사에 도착하자 말을 돌려보내셨다.
신해년(1371)8월 26일에 임금은 공부상서 장자온(工部商書 張
子溫)을 보내 편지와 도장을 주시고,또 금란가사와 안팎 법복과
발우를 내리신 뒤에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 중흥
조풍 복국우세 보제존자’로 봉하시고,태후도 금란가사를 올렸다.
그리하여 동방의 제일 도량인 송광사에 있게 하셨는데,내시 이사
위(李士渭)를 보내 길을 돕게 하여 28일에 회암사를 출발하여 9월
27일에 송광사에 도착하였다.
임자년(1372)가을에 스님은 우연히 지공스님이 예언한 ‘삼산양
수’를 생각하고 회암사로 옮기기를 청하였다.임금은 또 이사위를
보내어 회암사로 맞아 오셨다.
9 월 26일에는 지공스님의 영골과 사리를 가져다 회암사의 북
쪽 봉우리에 탑을 세웠다.
계축년(1373)정월에는 서운(瑞雲)․길상(吉祥)등 산에 노닐면
서 여러 절을 다시 일으키고,8월에 송광사로 돌아왔다.
9 월에 임금님은 또 이사위를 보내 회암사에서 소재법회(消災法
會)를 주관하라 청하시고,갑인년(1374)봄에 또 가까운 신하 윤동
명(尹東明)을 보내 그 절에 계시기를 청하였다.이에 스님은 “이
땅은 내가 처음으로 불도에 들어간 곳이요,또 우리 스승[先師]의
영골을 모신 땅이오.더구나 우리 스승께서 일찍이 내게 수기하셨
으니 어찌 무심할 수 있겠는가”하고 곧 대중을 시켜 전각을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