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3 - 선림고경총서 - 29 - 산암잡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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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암잡록 上 63
을 베껴 쓰니,우리가 보기에도 뼈에 사무치게 마음 아팠으나 어
찌할 수 없었다.오(吳)의 원년(1359)에 군대가 명주를 점령하여
방국진이 조정에 항복하자 유인본이 충성하지 않는 죄를 논하여
그의 등을 채찍질하니 등이 터지고 창자가 드러난 채 결국 죽고
말았다.
구육은 하나의 용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죄복(罪福)의 응보를
알지 못한 자이니 그래도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유인본은 공자
의 학문을 배우고서 차마 이러한 일을 자행할 수 있었을까?공자
의 말에 의하면,‘신을 공경하되 신명이 앞에 있는 것처럼 하라’고
하였다.더구나 우리 부처님은 삼계의 큰 성인이시다.그런 까닭
에 한 사람은 불상을 부수고 한 사람은 불경을 파손하였는데 발
걸음을 돌리기도 전에 극형의 응보를 받았다.이는 받아야 할 것
을 받은 것으로서,실제로 스스로가 자초한 응보이지 우리 성인이
보복한 것은 결코 아니다.
29.쥐들의 보답
은성(鄞城)의 관강소(官講所)에 두 스님이 함께 살았는데,그 중
한 스님이 쥐가 설치는 것이 괴로워 크고 작은 두 개의 막대기를
가지고서 쥐덫을 마련하여 비치는 거울을 장치해 두었다.쥐가 이
를 건드리다가 덫에 걸리자 그 스님이 급히 뛰어나가 물을 가져
다가 쥐를 처넣어 죽이려고 하였는데 같이 있던 스님이 차마 볼
수 없어 몰래 막대기를 들어올려 쥐를 놓아주었다.이튿날 쥐덫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