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3 - 선림고경총서 - 33 - 종용록(중)
P. 143
종용록 中 143
왕개보(王介甫)노인이 바둑 둘 때의 은어(隱語)가 있었으니
이르되 “저쪽도 감히 먼저 하지 못하고,이쪽도 감히 먼저 하
지 못한다.감히 먼저 할 수 없는 바로 그것 때문에 다툼이 없
고 다툼 없는 바로 그것 때문에 죽지도 살지도 않는 데로 들어
간다”하였는데,바둑이란 앞서기를 다투는 법이다.약하면 선
수(先手)부터 약하고 지면 머리가 숙여진다.조주는 상대가 손
을 쓰기 전에 벌써 몇 수를 내다보는데 엄양은 그저 옆으로 달
리고 곧게 들여 치노라 군 점이 몇 갈래나 되었던가?그래서
도끼자루가 이미 썩은 줄도 몰랐다.
왕씨신선전(王氏神仙傳)에 전하는 말이 있다.진(晋)융안
(隆安)때에 신안현(信安縣)에 사는 왕질(王質)이라는 사람이 나
무를 하러 갔다가 현실판(眩室坂)에 이르니 석실(石室)이 있었
는데,그 안에서 네 동자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왕질에게 무엇
인가를 주는데 크기가 대추씨 만한 것이 머금고 있으니 시장하
지 않았다.바둑이 끝나자 허리에 찼던 도끼자루가 썩어 내렸
고 옷이 바람결에 다 날아가 버렸다.저물녘에 집에 돌아오니
이미 수십 년이 지났다고 하였다.
‘놓아버리라,짊어지고 가라’한 조주의 두 마디의 말씀이 힘
줄을 뽑아내고 골수를 바꿔 주어,단번에 조주와 더불어 손을
잡고 함께 걸으면서 허공을 딛고 거뜬거뜬 움직이게 한 것이
다.어떤 이는 이르기를 “맑고 한가로우면 참 도의 근본이요,
일이 없으면 작은 신선이라”하였거니와,일없음으로써 일이
없다고 여기지 말아야 하나니 간혹 일은 일없는 데서 나오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