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6 - 선림고경총서 - 35 - 벽암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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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할 수 있다면 하룻밤 쉬어가지요.”
                   구지스님이 또다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비구가 바로 떠나 버
                 리니,구지스님은 탄식하였다.
                   “나는 장부의 모습을 가지고서도 장부의 기상이 없구나.”
                   마침내 분발하여 ‘이 일’을 밝히고자 암자를 버리고 여러 총
                 림의 선지식을 참방하여 법문을 청하려고 (신변을)정리하여 행

                 각을 하리라고 다짐하였는데,그 날 밤 꿈에 산신(山神)이 나타
                 나 그에게 고하였다.
                   “이곳을 떠날 필요가 없다.내일 육신보살(肉身菩薩)이 찾아
                 와서 스님을 위하여 설법하실 것이니,부디 떠나지 마시오.”
                   과연 천룡(天龍)스님이 그 이튿날 암자에 이르렀다.구지스님
                 이 예를 갖추어 맞이하고 전에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말하였
                 다.천룡스님이 한 손가락을 세워 그에게 보여주자,구지스님은
                 갑자기 완전히 깨쳤다.이는 당시 그가 정중하고 한결같이 참구

                 [專注]하였기 때문에 통의 밑바닥이 쉽게 빠진 것이다.그 후로
                 는 묻기만 하면 오직 손가락을 세워 보일 뿐이었다.
                   장경(長慶:859~932)스님은 “맛있는 음식도 배부른 사람에
                 게는 소용없다” 하였으며,현사(玄沙:835~908)스님은 “내가
                 그 당시에 그 꼴을 보았더라면 손가락을 꺾어 버렸을 것이다”
                 하였으며,현각(玄覺)스님은 “현사스님이 이같이 말한 뜻은 무
                 엇인가?”하였으며,운거 석(雲居錫)스님은 “현사스님이 이처럼

                 말했던 것은 그를 긍정한 것인가,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인가?
                 그를 긍정했다면 무엇 때문에 그의 손가락을 꺾어 버렸으리라
                 고 말했으며,그렇지 않다면 구지스님의 허물은 어디에 있는 것
                 일까?”하였으며,선조산(先曹山:840~901)스님은 “구지스님이
                 알아차린 것은 거칠다.그것은 한 기틀,한 경계만을 알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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