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5 - 선림고경총서 - 35 - 벽암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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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 上 175
-이 늙은이도 천하 사람들의 혀를 꼼짝 못 하게 하는군.날씨가 뜨거
우면 온 천지가 모두 뜨겁고 차가우면 온 천지가 모두 차갑다.천하
사람들의 혀를 바꾸어 놓았구나.
평창
만일 손가락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한다면 구지(俱胝)스님
을 저버린 것이며,손가락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하지 않는다
면 무쇠로 주조한 것과 같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리라.알아도
이와 같고 몰라도 이와 같으며,높아도 이와 같고 낮아도 이와
같으며,옳아도 이와 같고 그르다 하여도 이와 같을 뿐이다.그
러므로 “한 티끌이 일자마자 대지는 전부 그 속에 들어가고,꽃
한 송이 피어나니 온 세계가 열리고,사자의 한 털끝에 백억 개
의 사자가 나타난다”라고 했다.
원명(圓明)스님은 말하기를,“차가우면 온 천지가 모두 차갑
고,뜨거우면 온 천지가 모두 뜨겁다”고 하였다.산하대지는 아
래로는 황천(黃泉)에 통하고,삼라만상은 위로는 하늘에 통한다.
말해 보라,어떠한 물건이 이처럼 기괴(奇怪)한가를.이를 안다
면 조금도 힘들일 필요가 없겠지만 알지 못한다면 자기 자신을
질식시킬 것이다.
구지스님은 무주(婺州)금화(金華)사람이다.처음 암자에 주
석하고 있을 때,실제(實際)라는 한 비구니가 구지스님의 암자
에 이르러 곧바로 들어오더니,삿갓도 벗지 않고 지팡이를 든
채로 선상(禪牀)을 세 바퀴 돌면서 말하였다.
“말할 수 있다면 삿갓을 벗겠소.”
이처럼 세 차례 질문하였으나 구지스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
었다.이에 비구니가 떠나가려 하자 구지스님은 말하였다.
“날씨가 어두워지니 하룻밤 머무르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