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63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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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야기는 전설에 가깝지만 『금강경』의 이러한 대중성과 간편성을 웅

             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6조스님은 이 간편한 경전조차 내려놓는다. 오로지 무념법문을 종지

             로 한다는 선언이 있게 된 것이다. 이 무념법문에 대해서는 찬양과 비
             판이 교차되어 왔다. 찬양하는 쪽에서는 그 명확한 종지와 실천적 효

             용성에 주목한다. 비난하는 쪽에서는 그것이 마음의 절대성을 인정하
             는 외도(先尼外道)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러나 『육조단경』을 읽어보면 그

             무념법문은 반야진리에 철저하게 계합한다.
                사실 무념은 유념과 상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6조스님 스스로도 무

             념과 관련하여 “만약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모든 생각을 다 제거해
             버리는 방식이라면 한 생각이 끊어져 죽은 뒤 다른 곳에서 생을 받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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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될 것이므로 큰 잘못” 이라고 했다. 이것을 멍청한 무념이라 말할 수
             있겠다. 무념의 핵심은 의식 활동이 대상경계에 머물거나 집착하지 않

             는 데 있다. 의식 활동을 멈추어 무생물처럼 되는 일이 아닌 것이다. 오
             히려 그것은 인지 작용의 본래적 완전함과 생생함을 회복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인지 작용에 있어서 모
             든 것에 두루 호응하고 자유롭게 통한다면 그것이 무념無念이다. 진여

             본성에서 비롯되는 지혜로써 관조하되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는 것이 무
             념이다.

                그렇다면 6조스님은 반야관조, 불이중도를 왜 무념으로 풀었던 것일
             까? 달마의 견성법이 제시된 후 깨달음을 선언하는 가짜 선지식이 넘쳐

             났고 그 폐해 또한 적지 않았다. 6조스님은 경계를 만나면 생각이 일어


                 렇게 ‘그 마음이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
              142   六祖大師法寶壇經』(T48, p.353a), “只百物不思, 念盡除卻, 一念絕卽死, 別處受
                 生, 是爲大錯.”



                                                            제6장 무념정종 ·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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