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66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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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키려야 일으킬 수가 없다.

               이에 비해 성철스님은 6조스님의 반야관조에 통하는 화두참구를 스
            스로의 실천 과제로, 그리고 수행자 교육의 핵심으로 삼는 입장에 있었

            다. 화두참구는 무념이라는 육조선의 종지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과정
            과 목적이 통일된 수승한 길로 인정받아 왔다. 그 닦음 자체가 곧 무념

            이라는 것이고, 무념의 닦음을 통해 구경무심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
            다는 것이다. 화두참구의 과정 자체가 바로 무념이라는 목적지이므로

            가장 빠른 길(徑截門)이라고도 했다. 간화선의 실천자로서 성철스님이 무
            념을 견성에 앞서 먼저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이 무념정종의 법문은 수행에 어떻게 적용되는 것일까? 그 전에 우
            리는 먼저 6조스님이 설한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의 상호 관계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무념, 무상, 무주는 하나의 진
            여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돈오문에서는 시간적 전후와 형상적 차별의

            불이성을 실경계로 체험한다. 그것은 『유마경』에서 말한 것처럼 “다양
            한 형상의 차별성을 분명히 인지하되 진여의 입장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能善分別諸法相,於第一義而不動)”이다.
               6조스님의 3무법문三無法門이 바로 그렇다. 무념이란 생각 속에 있으

            면서 생각을 떠난 것이다. 생각의 작용은 분명하지만 대상경계에 오염
            되지 않는다. 일체의 현상에 대해 시비호오의 차별상을 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상이란 형상에 있으면서 형상을 떠난 것이다. 천차만별의 형
            상에 휘둘리지 않고 진여불성에 안주한다는 뜻이다. 무주란 세간의 선

            악호오에 대해 취사선택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무념, 무상, 무주의 어느 경우라 해도 진공묘유의 진여불성을

            떠나지 않는다. 대상경계에 흔들리지 않는 무념이 된다는 것은 형상에
            차별상을 내지 않는 무상을 실천하는 일이다. 또한 그것은 생각에 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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