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71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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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만 수행 과정에서는 이 둘 사이의 무게 중심이 어디에 놓이는가

             에 따라 비추되 동요 없는 멈춤(止)과 멈추되 변함없는 비춤(觀)으로 구
             분할 수 있다는 것이 『기신론』의 관점이다. 그러니까 조이상적의 방점은

             항상 고요함(常寂)에 있어서 멈춤(止), 혹은 선정(定)과 동의어가 된다. 이
             에 비해 적이상조의 방점은 항상 비춤(常照)에 있어서 관찰(觀), 혹은 지

             혜(慧)와 동의어가 된다.
                이것은 3제의 원리로 설명될 수도 있다. 법계의 모든 사물은 있는 그

             대로 공이므로 항상 고요하다(常寂=空). 그런데 이 사물의 밖에 진리가 따
             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를 밝게 구별하여 비추는 일이 있어야 한다(常

             照=假).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전제로 하는 동시적 실천으로 완전해진
             다. 그리하여 고요함도 아니고 밝은 비춤도 아닌 일(非寂非照=中)이 된다.

             이를 공가쌍조空假雙照라고도 표현한다. 물론 상적상조와 같은 말이다.
                이러한 도리이기 때문에 깨달음을 닦는 수행자는 몸과 마음의 간섭

             에 교란되지 않아야 하고 망상과 관행을 밝게 관찰하여야 한다. 이것이
             태어남이 없는 이치를 바르게 닦는 길이다. 이때 몸과 마음의 간섭에

             교란되지 않는 것이 조이상적한 오묘한 선정이고, 망상과 습기를 밝게
             관찰함이 적이상조한 오묘한 지혜이다. 이것을 동시적으로 실천하는 것

             만이 진정한 수행이고, 이것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것만이 진정한 깨
             달음이다. 『선문정로』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적멸과 관조는 따로 구별

             되는 둘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를 동시적으로 실천하는 일은 불가
             능할 것이다. 이 때문에 상적상조의 법문에서 유독 쌍雙, 동시同時, 원

             돈圓頓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 단계나 수행법에 따라 앞과 뒤가 형성되고,

             강조의 방점이 다르게 찍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방편으로써의 수행을
             인정하는 경우, 먼저 고요함을 추구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래서 조이




                                                            제12장 상적상조 · 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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