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75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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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것은 조적照寂과 적조寂照의 차이를 언급한 대목에서 분명하게 확
인된다.
성철스님은 “등각보살은 조적照寂이요 묘각세존은 적조寂照라 한다.”
라는 『영락경』의 문장을 인용한다. 여기에서 스님은 적과 조가 둘이 아
니라는 기본 입장을 취하면서도 그 둘의 미세한 차이를 지적한다. 즉
조적에는 비추는 작용이 남아 있어서 여래의 적조와 구분된다는 것이
다. 아직 미세식광이 남아 있는 경계이므로 구경의 불지가 아니라는 것
이다. 요컨대 등각은 아뢰야식이 멸진하지 않았으므로 충분히 적寂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상적상조가 수행론으로 언급되는 것에 비해 성철스님은
적조, 혹은 적광寂光이 구경각을 성취한 부처님의 경계라는 점을 강조
한다. 그러니까 상적상조 역시 직접 실경계로 그것을 체험했는지를 판
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항상 고요하면서 항상 비추고 있는가를 지
금 당장 점검해 보라는 것이다. 이처럼 『선문정로』는 수행의 지침인 동
시에 깨달음을 판별하는 표준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표준에 의해 점검해 보면 답은 항상 완전히 그렇다는 쪽, 혹은 아
직 그렇지 못하다는 쪽, 둘 중의 하나밖에 없다. 그렇지 못한 상황이라
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답도 이미 나와 있다. 화두참구 열심히 하라
는 것 외에 다른 말이 없기 때문이다. 제8아뢰야식의 미세망상이 흔적
조차 없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파참破參은 없다. 오로지 화두참구에 들
어 향상일로의 길을 걷는 일만 있다는 것이다.
사실 조이상적照而常寂, 적이상조寂而常照와 그 줄임말인 상적상조는
어감에 있어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원래의 조이상적과 적이상조의 어
휘에는 실천적 역동성이 느껴지지만, 상적상조는 변함없는 경계를 강조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용례가 흔하지 않은 상적상조를 표제어로
제12장 상적상조 · 5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