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15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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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는 과정에서 수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원론적 입장에서 보자
면 앞의 3단계는 얼마든지 등호(=)로 연결될 수 있는 관계에 있다.
이러한 선수증의 단계론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 돈오점
수설이다. 이것은 단번에 여래의 자리에 들어간다는 선문의 대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깨달음의 고저심천을 설명할 수 있는 효과적인 논
리체계로 인식되었다.
돈오점수에 대한 최초 언급은 『능엄경』에 보인다. “이치로 보자면 단
번에 깨닫는 것이지만, 실천적으로 보자면 번뇌는 단번에 제거되는 것
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소멸하여야 한다.” 335 는 것이다. 특히 규봉스님은
선과 교를 통섭하면서 이원적 분별 사유에서 불이사유로 넘어가는 깨
달음의 여정에 돈오점수의 단계를 제시하였다. 그로 인해 이 돈오점수
는 선의 정통으로 규정된다. 보조스님 역시 이에 공감하고 적극 수용하
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이러한 돈오점수의 돈오가 분별의식 차원의 해오
에 해당하며 이것으로는 궁극적 무심으로 건너갈 수 없다고 비판한다.
해오는 원래 증오證悟와 상대되는 말이다. 해오는 분별적 이해의 차원
이고, 증오는 체험을 통해 변화가 완결되는 차원이기 때문이다. 해오를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지해적 차원에서의 눈뜸을 체험한 뒤, 그것을 체
화하여 이론과 실천을 일치시키는 길을 걷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본다.
해오의 안내를 받아 최후의 증오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해오를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그로 인해 지견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고, 경계를 만났을 때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해
『
335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T19, p.155a), “理則頓悟, 乘悟併
銷. 事非頓除, 因次第盡.”
제13장 해오점수 · 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