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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어떻게 보아도 이원적 분별 사유의 차원으로서 그것으로는 모양

            (色)과 공성(空)을 둘 아닌 관계로 보는 진정한 눈이 열릴 수 없다는 것
            이다. 그래서 해오를 상사반야相似般若, 즉 비슷하기는 하지만 진짜가

            아닌 반야로 부르기도 한다.
               또한 해오를 무의미한 정도가 아니라 장애로 보는 입장도 있다. 이

            관점에 의하면 해오는 인연의 그림자, 허망한 마음의 영역에서 일어나
            는 일이다. 그것이 의식작용에 의지하여 있으므로 분별망상을 떠날 수

            없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착실한 수행과 진실한 깨달음에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간화선의 완성자인 대혜스님은 극단적으로 말

            한다.


               만약 화두를 버리고 따로 문자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경전의 가르

               침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옛사람의 공안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일상의 번뇌에서 의심을 일으킨다면 모두 삿된 마귀의 권속이다.                      336



               공안에 대한 이론적 이해나 질문은 진정한 화두가 아니라는 말이다.
            감산스님도 같은 차원에서 “예나 지금이나 도를 이해하려 하지 스스로

            그 자체가 되려 하는 이 드물고, 이치를 말하려 하지 이치와 한 몸이
            되는 이 드물다.”라고 탄식한다. 지견을 구하고 해오를 구하는 이는 소

            의 털처럼 많지만, 도를 깨닫는 이는 토끼의 뿔과 같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증오는 실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오직 모를 뿐인 마음
            으로 활구참구에 몰입하다 보면 홀연 생각이 딱 쉬어지며 찌꺼기 한 점



                『
             336   大慧普覺禪師語錄』(T47, p.930a), “若棄了話頭, 却去別文字上起疑, 經教上起
                疑, 古人公案上起疑, 日用塵勞中起疑, 皆是邪魔眷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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