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7 - 퇴옹학보 제1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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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에 나타난 퇴옹 성철의 유식사상 •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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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까 두려워하노라.” 라는 게송을 인용한다. 그러면서 “아타나식 16)
14) 해심밀경』 1권(T16, 692c), “阿陀那識甚深細. 我於凡愚不開演. 一切種子如瀑流. 恐彼分
『
別執爲我.” 그런데 『성유식론』에서도 『해심밀경』을 인용하는데(解深密經亦作是說), 그 인
용하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아다나식(ādāna-vijñāna)은 심오하고 미세하다. 일체종자
는 폭류와 같다. 나는 어리석은 범부에게 설명[開演]할 수 없다. 저것[아다나식]을 분별하
여 자아라고 집착할까 두렵기 때문이다.”(阿陀那識甚深細 一切種子如瀑流 我於凡愚不開
演 恐彼分別執爲我)
감산이 인용한 게송에서는 “아타나식(ādāna-vijñāna)은 심오하고[甚深] 미세하여[細]
습기종자가 폭류를 이룬다. 나는 어리석은 범부에게 설명[開演]할 수 없다. 저것[아타나
식]을 분별하여 자아라고 집착할까 두렵기 때문이다.”(阿陀那識甚深細. 習氣種子成瀑流.
我於凡愚不開演. 恐彼分別執爲我.)라고 하여, 『해심밀경』 등에 등장하는 게송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즉 『해심밀경』에서는 ‘一切種子如瀑流’라고 하였으며, 감산의 게송에서는 ‘習
氣種子成瀑流’라고 했다.
성철도 『선문정로(개정판)』(73)에서 『해심밀경』의 이 게송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번역한
다. “아타나식(阿陀那識)이 극심히 심세(深細)하여 일체 생멸의 종자가 폭포같이 유동한
다. 내가 우매한 범부에게 이 아타나식(阿陀那識)을 개연(開演)하여 설명하지 않는 것은,
피등(彼等)이 분별하여 진아(眞我)라고 오집(誤執)할까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성철은 ‘개연’을 ‘개연(開演)하여 설명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여, 이중[개연, 설명]으
로 번역하였다. 즉 ‘개연’이나 ‘설명’은 동일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법문은 구어체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중이 알아듣기 쉽게 반복해서 하는 말을 녹취록 그대로 옮겨 적었
기 때문에 이런 번역이 된 것 같다. 사족을 붙이자면 ‘개연’을 ‘시작’으로 번역하기도 하지
만, 필자는 성철의 번역에 따라 ‘개연’을 ‘설명’으로 번역했다. 왜냐하면 『성유식론술기』에
서 “개(開)란 오묘하고 숨어있어 드러나지 않는 것을 설하는 것이며, ‘연(演)이란 축약하여
알기 어려운 것을 널리 설하는 것’(T43, 233c)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즉 ‘개연’이란 ‘교설
을 처음 널리 설하여 나타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15) 퇴옹성철(2014), 중권 361.
16) 아타나(阿陀那)란 ‘유지하다·보지(保持, 지키고 보존하다)하다’는 의미인 아다나(‘ādāna)’
의 음사이다. 그러므로 아타나식이란 ‘생명을 유지하고 보지하는 식’이다. 그래서 의역하
여 ‘집지식(執持識)’이라고도 한다. 아타나식은 심층의 근원적인 식인 아뢰야식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근본식인 아뢰야식은 일체 존재를 생기게 하는 가능력[종자]과 감각기관[유근
신]을 보지하고 유지하며 동시에 또 다시 재생 할 때 상속하여 이어가는 식이기 때문에
아타나식이라고 한다. 『성유식론』에서는 아타나식을 “능히 제법의 종자를 ‘집지’하고, 능히
색근[승의근]과 의처[부진근]를 ‘집수’하며, 능히 결생과 상속을 ‘집취’하기 때문에 이 식을
아타나식이라고 한다.”(『성유식론』 3권(T31, 14c07), “以能‘執持’諸法種子. 及能‘執受’色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