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9 - 퇴옹학보 제1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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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에 나타난 퇴옹 성철의 유식사상  • 109




               제나[恒] 세심하고 집요하게[審] 사량하여[思量] 아상에 따른다[집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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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하여> 유정[중생]은 언제나[鎭] 밤낮으로 혼미하다.” 라고 말나식
                                      22)
               을 설명하고 있는데, 감산 은 『팔식규구』에 대한 주석서인 『팔식규구




               21) 『팔식규구통설』(X55, 423b9), “恒審思量我相隨. 有情日夜鎭昏迷.”
                    성철은 “항상 심사하고 헤아려 아상이 따라서 중생이 밤낮으로 혼미에 빠진다.”라고 번역
                 한다.(퇴옹성철(2014), 중권 346)
               22)  감산 덕청(憨山德淸, 1546~1622)은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금릉(金陵) 전초현(全椒懸)
                  출신이며, 속성(俗姓)은 채(蔡)이고 이름은 덕청(德淸)이며 자는 징인(澄印)이다. 그는 11
                  세에 출가하여 19세 때 무극(無極) 대사에게서 청량(淸凉)대사 징관(澄觀, 738-839)의
                  『화엄현담(華嚴玄談)』 강의를 듣고서 십현문(十玄門) 중의 ‘해인삼라상주처(海印森羅常住
                  處)’라는 구절을 듣고서 법계의 원융무진의 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청량의 경
                  지를 실감하고서 스스로를 징인(澄印)이라는 호(號)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일반적으로
                  감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감산이란 호(號)는 그의 나이 28세 때 “정월에 오대산을 찾아
                  갔다. 그러던 중 북대(北臺)에 이르니 여기에 감산(憨山)이 있다고 나와 있었다. 그래서 그
                  산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어느 스님이 산을 가르쳐 주었다. 과연 수려하고 빼
                  어난 산이었다. 그래서 혼자 마음속으로 산명을 내 호(號)로 삼았다.”(감산덕청 지음, 대
                  성 옮김(2015), 『감산자전』, 서울: 탐구사, 41)는 기록에서 유래하였다.
                    그는 화엄종을 배운 화엄학자이나 오대산 중의 북대(北臺)인 감산에서 선법을 닦아 교[화
                 엄]과  선의  융합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주굉(袾宏,  1536~1615)·진가(眞可,
                 1543~1603)·지욱(智旭, 1596~1655)과 더불어 명나라 시대의 사대고승(四大高僧) 중의
                 한 명이다. 특히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진가와 교류는 유명하다. 또한 지욱은 그의 손 상
                 자이다. 지욱도 『팔식규구』에 대한 주석서인 『팔식규구직해』와 『대승백법명문론』의 주석서
                 인 『직해』를 남기고 있다.
                    그는 중생교화뿐 만 아니라 사찰 중수에도 힘을 쏟았는데, 사찰 중수를 위해 당시 황태후
                 의 시주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50세(1595)에 ‘도
                 교의 사원 터를 빼앗고 황실의 공금을 유용하여 절을 지은 죄’로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다.
                 그렇지만 대중의 건의로 황제는 단지 황제의 명이 없이 사사로이 절을 창건한 죄만 물어 광
                 동성 뇌주(雷州)에 있는 군 주둔지로 감산을 유배 보낸다. 그의 유배생활은 66세 때(1606)
                 까지 이어진다. 유배 중에도 그는 56세(1601)에 조계산 혜능 스님의 유적지를 복원한다.
                 그 당시 조계산은 시정잡배에게 점거당하고 있었는데, 그 때 심정을 그는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만약 이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6조의 도량이 난장판이 되겠구나.”(앞의 책, 133)라
                 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사회활동과 구제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대부와 대중의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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