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3 - 퇴옹학보 제1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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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에 나타난 퇴옹 성철의 유식사상 •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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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이[변화]의 판별 을 본성으로 한다. 감수작용[수]의 의지처이다.” 라
고 정의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통적으로 ‘촉’은 삼자가 만나 감각기관
의 변화에 의해 대상을 판별하는 것이며, ‘수’ 등의 의지처라고 정의한
다. 반면 지욱은 『직해』에서 촉심소를 “근·경·식의 삼화(三和)가 일어날
때, 심과 심소를 대상에 접촉시키는 것을 본성[體性]으로 삼고,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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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등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작용으로 삼는다.” 라고 주석한다. 즉 촉
이란 마음[심, 심소]을 대상에 접촉시키는 것이며, 수 등의 의지처라고 정
‘
73) 변이(變異, vikāra)’란 감각기관[根]이 대상으로 향할 때 본래의 모습이 변한다는 의미이
다. 그리고 ‘분별[판별, pariccheda’이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분별’의 의미가 아니다. 여
기서는 ‘닮다’(相似, 서로 닮다)라는 의미로 인식작용[識]이 감각기관[根]의 변화와 닮는다
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한증탕에 들어가면 더운 열기[인식대상]가 피부[감각기관]에 닿아
피부가 열기를 감지한다. 그리고 피부[감각기관]의 변화에 따라 덥다는 것[인식작용]을 느
끼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들이 어떤 것을 안다[인식]고 하는 것은 감각기관(根, 피부)·인
식대상(境, 열기)·인식작용(識, 덥다)의 3가지 조건이 만나는 것[접촉]에 의해 처음으로
성립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감각기관[根], 인식대상[境], 인식작용[識] 중에 하나라도 결
여되어 있으면 우리들의 앎[인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인식대상
[境]은 감각기관[根]·인식작용[識]’과 만나는 것에 의해 변한다. 예를 들면 누구에게도 보
이지 않고 산속에서 피는 한 송이 들국화[인식대상]도 누군가의 감각기관[根], 인식작용
[識]과 만나는 것에 의해 들국화가 된다. 그래서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
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하였는지 모른다. 즉 이와 같이
변화하는 것을 『성유식론』에서는 “변이(變異)로 분별[판별]하다”라고 주석한다. 그래서
『성유식론』에서는 “촉이란 삼이 화합하여[三和] 변이(變異)로 분별한다. 심과 심소를 대상
에 접촉하게 하는 것을 본성으로 하고, 수·상·사 등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작용으로 한
다.”(T31, 11b16), “觸謂三和. 分別變異. 令心心所觸境爲性. 受想思等所依爲業.”)라고 하
였던 것이다.
74) 범본: trikasamnipāta indriyavikāraparicchedaḥ/
vedanāsamniśrayadānakarmakaḥ//(Gokale, 15, 38-16, 1)
한역: 『집론』(T31, 664a26-27), “謂依三和合諸根變異分別爲體. 受所依爲業”
75) 『직해』(X48, 342c8), “和之時. 令心心所觸境. 以爲體性. 受想思等所依. 以爲業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