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4 - 퇴옹학보 제1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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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 『퇴옹학보』 제17집
아니라 돈오점수라고 해서는 안 된다. 양명은 기본적으로 돈오돈수의
입장이지만 제자들의 눈높이에 따라 설명하는 이른바 대기설법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양명은 정법(定法)을 고수하기보다도 체인·자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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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시하였다. 또한 ‘병에 따라 그에 적합한 처방을 하는’(因病立方) 교육
방법을 통하여 각 개인의 개성을 발현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문하에서는 그가 설하는 양지가 받아들이는 자의 기질이나 태도를 포
함한 이른바 개성의 여하에 따라 이해 및 해석의 방식이 달라질 수 있
었다. ‘사구교’ 논쟁은 양명의 제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치양지설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양명학의 초기적 ‘분열’이라
할만하다.
양명학 분열의 징조는 왕양명 생존 당시, 왕기와 전덕홍이 스승이 말
한 적 있는 ‘사구교’에 대해 서로 논하다가 의견이 대립된 것이었다. 가
정(嘉靖) 6년(1527, 양명 56세) 9월 왕양명이 사주(思州)·전주(田州)의 반란
을 진압 이른바 ‘사전원정’(恩田遠征)-을 위해 출발하려던 전날 밤 소흥
의 천천교(天泉橋)에서 이루어졌다.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이 마음의 본래 모습이다(無善無惡心之體).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이 의지의 움직임이다(有善有惡意之動).
선을 알고 악을 아는 것이 양지이다(知善知惡是良知).
선을 행하고 악을 떨치는 것이 격물이다(爲善去惡是格物).
14) 徐愛, 「傳習錄序」, 『陽明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