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10 - 퇴옹학보 제1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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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 『퇴옹학보』 제17집
학자들은 오직 이것을 알지 못하여 마음을 버리고 사물을 쫓아 격물의 학문을 잘못 이해
하여 종일 밖에서 추구하였다. 단지 우연히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갑자기 엄습하여 취
해지는 것[義襲]을 행할 뿐이니, 평생 동안 행하면서도 밝게 알지 못하고 익히면서도 살피
지 못한다.”
설간이 여쭈었다.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듯이 하고, 악취를 싫어하듯이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바로 한결 같이 천리에 따르는 것이다. 천리는 마땅히
그와 같으니, 본래 사사로운 뜻에 따라 일부러 좋아하거나 일부러 싫어하지 않는다.”
설간이 여쭈었다.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듯이 하고, 악취를 싫어하듯이 하는 것’이 어
떻게 뜻[意]이 아닐 수 있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성실한 뜻[誠意]이지 사사로운 뜻[私意]이 아니다. 성실
한 뜻은 단지 천리에 따를 뿐이다. 비록 천리를 따른다고는 하지만 역시 조그만 뜻도 덧붙
여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성내거나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있으면 그 올바름을 얻지
못한다. 반드시 확 트여 크게 공정해야 비로소 마음의 본체가 된다. 이것을 아는 것이 바
로 감정이 아직 발하지 않은 중(中)을 아는 것이다.”
백생(伯生. 성은 맹(孟), 이름은 원(源). 왕양명의 제자)이 여쭈었다. “선생님께서는 ‘풀이
방해되면 뽑아내야 하는 것이 이치이다’라고 하셨는데, 풀을 뽑아버리는 것이 어째서 또
신체가 생각[念]을 일으킨 것이라고 하십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반드시 네 마음이 스스로 체득해야 한다. 네가 풀을 뽑
으려는 것은 무슨 마음이냐? 주돈이가 들창 앞의 풀을 뽑지 않은 것은 무슨 마음이냐?”
[侃去花間草, 因曰, “天地間, 何善難培, 惡難去?” 先生曰, “未培未去耳.” 少間曰, “此等看
善惡, 皆從軀殼起念, 便會錯.” 侃未達. 曰, “天地生意, 花草一般, 何曾有善惡之分? 子欲
觀花, 則以花爲善, 以草爲惡. 如欲用草時, 復以草爲善矣. 此等善惡, 皆由汝心好惡所生,
故知是錯.” 曰, “然則無善無惡乎?” 曰, “無善無惡者理之靜, 有善有惡者氣之動. 不動於氣,
卽無善無惡, 是謂至善.” 曰, “佛氏亦無善無惡, 何以異?” 曰, “佛氏着在無善無惡上, 便一
切都不管, 不可以治天下. 聖人無善無惡, 只是無有作好, 無有作惡, 不動於氣. 然遵(王之
道), 會其有極, 便自一循天理, 便有箇裁成輔相.” 曰, “草卽非惡, 卽草不宜去矣?” 曰, “如
此卻是佛老意見. 草若有碍, 何妨汝去?” 曰, “如此又是作好作惡.” 曰, “不作好惡, 非(是全
無好惡, 卻是無知覺的人). 謂之不作者, 只是好惡一循於理, 不去又着一分意思. 如此, 卽
是不曾好惡一般.” 曰, “去草如何是一循於理, 不着意思?” 曰, “草有妨礙, 理亦宜去, 去之
而已. 偶未卽去, 亦不累心. 若着了一分意思, 卽心體便有貽累, 便有許多動氣處.” 曰, “然
則善惡全不在物.” 曰, “只在汝心. 循理便是善, 動氣便是惡.” 曰, “畢竟物無善惡.” 曰, “在
心如此, 在物亦然. 世儒惟不知此, 舍心逐物, 將格物之學錯看了, 終日馳求於外, 只做得箇
義襲而取, 終身行不著, 習不察.” 曰, “如好好色, 如惡惡臭, 則如何?” 曰, “此正是一循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