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7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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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옹성철의 중도법문이 한국불교에 미친 영향 •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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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인민재판에 휘말릴 정도였다. 이런 점에서 분단은 ‘중생의 어리석
음이 빚어낸 차별과 변견의 산물’이었고, ‘대립과 갈등이 없는 불성(佛性)
의 세계와 가장 거리가 먼 것’이었고, ‘나와 남이라는 구분을 넘어선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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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不二)의 세계와 철저하게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처럼 백일법문이 설
해지던 1960년대의 한국사회는 중도와 가장 거리가 먼 차별과 변견으
로 점철된 시절이었고, 그것이 고의 근원으로 작동하던 시대였다.
이런 갈등과 대립은 단지 세속적 주제로만 끝나지 않았다. 36년간의
일제강점은 한국불교에도 왜색불교라는 왜곡을 낳았다. 이른바 ‘대처
식육(帶妻食肉)’하는 문화의 일반화가 그것이다. 물론 승려의 결혼은 단
지 일재잔재의 청산이라는 문제를 넘어 불교의 근대화를 위한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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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로 모색이라는 측면도 존재한다. 그런 문제는 논외로 하고 대처문
제는 해방 이후 불교교단을 갈등과 대립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대처승은 왜색불교의 잔재이므로 청산해야할 대상이 되었고, 불교정
화라는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정화불사는 한국불교의 전통성 회복과
청정가풍 복원이라는 점에서 대의명분과 시대적 조류에 부합하는 운동
이었다. 문제는 그로 인해 인적 청산과 함께 근대적 시공에서 축적한 경
험의 단절을 초래했다는 점이다. 당시 대처승은 90%가 넘는 절대 다수
를 차지했고, 본사 주지 등 한국불교의 주류로 활동했다. 그런 대처승
15) 원택(1997), 36.
16) 서재영(2014), 5.
17) 서재영(2017),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