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8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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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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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 버리고 정등각하셨으니 양변을 버려야만 중도를 깨칠 수 있다” 고
            단언한다.
               중도의 깨침은 쌍차쌍조를 체득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있다

            없다, 진보다 보수다, 남성이다 여성이다와 같은 갖가지 차별변견을 모

            두 부정하는 쌍차(雙遮)가 곧 깨달음이며, 쌍차를 통해 너와 나, 진보와
            보수, 남성과 여성이 모두가 긍정되는 쌍조(雙照)가 곧 깨달음이 된다. 여

            기서 깨달음의 문제는 신비주의적 문제를 벗고 명료해진다. 한국불교는

            누구나 깨달음을 지향하기 때문에 혹자는 한국불교를 향해 깨달음지
                                     87)
            상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깨달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깨달음만
            을 추구한다면 무모한 것이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한데 자기 자신만
            신비적 깨달음을 지향한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세상의 고가 차별변견과 양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중도는 그와

            같은 고를 해소하는 열쇠가 된다. 따라서 깨달음은 세상을 고통으로 몰
            아넣은 원인을 제거하고 참다운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깨

            달음의 탈역사성이라는 문제는 반전을 맞이한다. 깨달음은 사회적 문
            제를 외면한 개인적 인식의 전환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고를 해소하는

            대승적 해법이 되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지향하는 것은 초월성이 아니

            라 사회적 고를 해소하는 대승적 실천이라는 의미로 전환된다.
               퇴옹의 중도사상은 고의 근본과 깨달음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




            86) 성철(2014), 117(상권).
            87)  2015년 2월 28일 열린 제1회 종교포럼에서 조성택 교수는 “깨달음의 특권화가 소통의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지적하고, “깨달음은 신비한 ‘무엇’, 일상적 체험으로 가늠할 수 없
               는 신비의 경지”로 여기도 있다고 비판했다. (불교신문, 2015년, 3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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